“멜버른 가지 왜 브리즈번 가세요? 브리즈번은 시드니의 축소판이에요.”

카페에 갔을 때 일하던 한국 분이 우리에게 말했다. 솔직히 브리즈번이란 도시에 기대를 걸지 않았다. 애초에 발음이 부드럽고 예뻐 보인다는 이유로 고르기도 했고, 중간에 어떤 섬에서의 2박 3일 일정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시드니에서 국내선을 타고 한 시간 정도 걸려 브리즈번에 도착했다. 2주간의 여행 중에 체류 도시를 바꾸는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첫 번째 도시가 익숙해질 때쯤 환기도 되고,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설렜다. 물론 이번 일주일이 지나면 달콤한 허니문도 끝이라는 게 아쉽지만, 앞으로 펼쳐질 브리즈번에서의 시간을 생각하면 힘이 났다.

브리즈번은 호주에서 시드니, 멜버른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다. 호주의 수도가 캔버라인데 어째서인지 캔버라는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브리즈번에는 25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퀸즐랜드주의 주도이다. ‘Sunshine state’라 불리는 퀸즐랜드인 만큼, 햇살이 따뜻하고 맑은 날이 많기로 알려져 있다. 브리즈번은 2032년에 하계 올림픽 개최지인데, 때문에 땅값이 많이 올랐다는 후문도 들었다.

공항철도를 타고 숙소가 있는 시내에 도착했다. 엇. 한국 분이 해줬던 말이 맞았다. 시드니 도심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숙소로 가는 길은 폭이 좁고 사람도 많았다. 가뜩이나 캐리어도 무거운데 얕은 오르막 경사로를 오를 때에는 당황했다. 순간적으로 도시를 잘못 골랐나? 싶었다. 도심이니까, 아직 우리가 브리즈번을 모르니까 좀 지켜보자며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부터 극적인 풍경이 쫙 펼쳐지길 바랐다면 도심이 아닌 다른 곳을 택하면 될 일이었겠지.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커튼을 걷었다. 와!!! 이번에도 소리를 질렀다. 구불구불 브리즈번강이 흐르고 대관람차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저만치 강 건너편 공원에는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삭막한 도시 숲만 있는 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었다.

우리는 짐을 풀고 강을 건너가 보기로 했다. 서울에는 폭이 1km나 되는 한강이 있다면 브리즈번에는 브리즈번강이 있다. 브리즈번강은 한강보다 폭이 3분의 1 수준이었다. 지도를 보면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어 뱀이 땅에 그린 그림 같았다. 한강은 이에 비하면 정말 직선으로 나 있구나.

대관람차가 있던 곳은 사우스뱅크(South Bank)라 불리는 지역이다. 1988년에 우리나라는 서울올림픽을 개최했지만, 브리즈번에서는 세계 엑스포가 열렸다. 엑스포가 끝나고 남은 공간을 민간 중심의 상업시설로 바꾸려다, 시민들과 함께 쓰는 공간을 조성하기로 했다. 덕분에 강변에는 시민들과 관광객이 쉬었다 갈 커다란 공원이며 작은 상점들, 식당들이 모여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바로 '스트리트 비치(Street Beach)’ 인공 해변이었다. 호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인공 해변으로, 인근에 유명한 해변인 골드코스트 모래를 퍼와 모래사장을 만들었다. 커다란 인공 풀과 야자수가 어우러진 풍경을 보니 순간 해수욕장인가 싶었다.

아이들은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이를 지켜보던 엄마, 아빠도 같이 들어가 함께 물을 튀기며 논다. 한둘이 아니었다. 관광객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브리즈번 시민들이 대다수를 이뤘다. 아이뿐만 아니라 연세 지긋한 어르신도, 젊은 사람들도 풀에 들어가 놀거나 발만 담그기도 하거나, 아니면 모래밭에 앉아 여유를 즐겼다. 안전요원도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안전하면서도 자유분방하게 즐기기 좋아 보였다. 바로 강 건너에는 고층 빌딩으로 즐비한데 도심과 해변의 모습을 한눈에 담다니 너무나 신기하고 새로운 발상에 놀라웠다. 뚝섬 한강에도 여름에 반짝 개방하는 수영장이 있다지만, 그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파라솔을 모자이크처럼 쫙 깔아 놓고 콘크리트 바닥 위에 돗자리를 까는 우리네 강변 수영장보다 훨씬 여유롭고 경쾌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배를 두들기며 우리는 사우스뱅크를 한 번 더 걸었다. 저녁 9시쯤 되었는데 아직도 수영장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낮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삼삼오오 모여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 옆에 놀이터가 있었는데 그물로 된 탑에 아이들이 빼곡히 매달리거나 오르락내리락하며 놀고 있었다. 20명쯤 되려나. 이곳에는 인종 가리지 않고 온 나라에서 온 것 같은 아이들이 뒤엉켜 놀고 있었다. 생김새며 피부색은 다르지만, 어린이들은 서로 양보하며 미끄럼틀 순서를 기다리기도 했다. 마치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 동요와 어울리는 한 장면 같았다.

얘들아…. 집에 안 가니? 내가 어렸을 땐 6시 정도에 해가 어둑어둑해질 때부터 "누구야~ 밥 먹자~" 하면서 집마다 엄마들이 놀이터로 나왔다. 손톱 밑에 모래가 잔뜩 낀 채 가기 싫다고 투덜거리지만, 결국 엄마 손에 이끌려 집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저녁 9시에 이렇게까지 놀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만큼 안전하다는 건가? 이미 주변 식당도 얼추 저녁 장사를 정리했고 상점은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지만 이곳은 이렇게 놀아도 안전하다, 놀 만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기에 가능한 풍경이 아니었나 싶다.

브리즈번에 머물면서 참 살기 좋은 도시란 인식을 몇 번 받았다.  크기가 큰 전동 휠체어에 탄 탑승객이 공항 전용 기차를 탈 때, 도우미가 승강장에서 안전하게 탑승할 수 있게 바로 도와주었다. 한 남성이 유아차와 함께 버스에 오를 땐, 기사 아저씨가 유아차를 내부 안전장치에 직접 고정하며 출발하기 전까지 꼼꼼하게 자리를 살폈다. 미술관에서는 일반적인 작품 설명란 아래에 어린이 수준에 맞게 풀어 쓴 설명의 푯말이 붙어있었다.  위치도 딱 어린이 눈높이에 맞췄다. 

내가 본 풍경은 극히 일부이지만, 배려가 기본인 도시임이 분명하다. 배리어 프리(Barrier-free). 누구에게나 장벽 없이 이동할 수 있고 각종 시설을 누릴 수 있는 걸 보면서 선진국답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부러웠다. 우리나라도 예전에 비하면 나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불편을 겪는 사람들이 많고, 하물며 어린이 출입을 제한하는 카페도 많다. 한국보다 훨씬 포용적이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모습을 보며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사회는 브리즈번과 닮은 모습으로 가면 좋겠다 싶었다.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어우러져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많아지면 좋겠다. 장애인이 버스를 탑승해도 '뭐야 뭐야'하며 힐끔 쳐다보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탑승할 수 있으면 좋겠다. 

도심을 관통하는 강의 모습은 그 도시를, 그곳에 사는 사람을 닮은 것 같다. 광활하고 직선적인 한강은 서울의 빠른 속도와 효율적인 시스템과 비슷하다. 브리즈번의 구불구불한 브리즈번강은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유연한 마음과 같다. 넓은 강폭만큼이나 더 많은 것을 품을 수 있는 서울이라면, 우리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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