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밴드 동아리에 피아노 치는 오빠가 있었다. 그의 손은 거칠어도 손가락은 길었다. 그는 검은 건반 흰 건반을 현란하게 넘나드는 스타일로 연주하진 않았다. 곡에 빠지면 서운한 전자음, 신시사이저를 몇 번 맡아서 연주했던 오빠로 기억한다. 가끔 대화해보면 말이 잘 통했다. 어쩌다 같은 해에 졸업하고, 또 어쩌다 보니 사귀었다. 그러다 결혼까지 했다. 맞다. 그 오빠는 지금의 레오다.

우리는 음악을 좋아했다. 봄이면 페스티벌에서 피크닉을 즐겼고 연말이면 콘서트를 갔다. 드라이브를 떠나면 그때그때 무드에 어울리는 노래로 바꿔 선곡했다. 밤중에 신나는 노래를 틀고 달리면 가로등 불빛은 오선지의 음표처럼 보였다. 도로를 달리다 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구간에서는 드럼의 박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각자 고른 곡 중에 어떤 게 더 마음에 드는지 이야기하는 게 일상이었다.

시드니에서의 마지막 날을 장식하기 위해 레오는 한 달 전에 미리 재즈바를 예약했단다. (센스 점수 1점이 추가되었습니다.) 저녁 9시 30분에 재즈 공연이 열리는데, 시간이 많이 남았다. 여섯 시쯤 저녁을 먹고 우리는 오페라하우스 야경을 또 보러 갔다. 어쩌면 살면서 다시 못 볼 수 있으니 눈에 한 번 더 담고 싶었다.

웬일인지 오페라하우스 주변이 인파로 붐볐다. 금요일 저녁이라 사람이 많은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걸었다. 세 개의 뾰족한 지붕 아래 계단이 있었는데 빼곡히 사람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관광객이 많았던 한낮의 오페라하우스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야외 공연이 열리나? 시드니도 ‘불금’이라는 게 있나? 회사에서 퇴근한 오피스룩 차림의 사람도 있었고 공연을 즐길 채비를 하고 편한 복장으로 공연장을 찾는 사람도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호성과 함께 공연이 시작되었다. 누구지? 전광판에 적힌 이름을 찾아 바로 검색해 봤다. 톰 요크(Thom Yorke)?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톰 요크는 영국의 록 밴드 라디오헤드의 멤버구나. 

“(과광), (과광), 아임 어 크립~”

그 유명한 ‘Creep’을 부른 라디오헤드의 리더라니!

공연장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 저만치 스크린을 보며 귀동냥으로 들었다. 톰 요크의 기타 소리는 좋았지만 약간 슬프면서도 우울한 느낌의 멜로디가 주를 이뤘다.

솔직히 내 스타일의 곡은 아니었는데 쌀쌀한 바닷바람과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하버 브릿지의 야경이며 음악을 듣는 사람들, 바에서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한 풍경과 묘하게 어우러졌다.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했다. 마지막 밤이라 그랬나 기타 선율이 유독 애잔하게 들렸다. 내가 유일하게 아는 ‘Creep’을 불러주길 바랐지만 나오지 않았다. 아쉽지만 발걸음을 돌렸다.

재즈 공연까지 한 시간 남았다. 미리 알아본 정보에 따르면, 오페라하우스와 멀지 않은 록스(Rocks)라는 구역에서 핼러윈 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곧장 록스로 향했다. 광장 한 면을 푸드 트럭이 둥글게 에워쌌다. 무대 위에는 수수한 차림의 3인조 컨트리 밴드가 있었다. 무대 가까이에서 음악을 듣는 사람들, 선 채로 핫도그 같은 주전부리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커다란 잭오랜턴과 해골 조각물 옆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동네 축제 같았다. 정겨운 분위기를 만드는데 컨트리 음악이 큰 역할을 했다. 흥이 나면서도 4분의 4박자로 듣기 편안했다. 우리는 뜨거운 사과 크럼블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테크노나 날카로운 록 음악이 나왔다면 엉덩이를 흔들진 못했을 것 같다. 난생처음 즐겨보는 핼러윈이라 얼떨떨하면서도 신났다. 생각보다 무시무시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어느덧 9시 20분, 재즈 공연이 10분 남았다. 부랴부랴 재즈바 휴버트(Hubert)로 향했다. 갑자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목에 둘렀던 스카프로 대충 머리를 감싸고 질주했다. 숨을 헐떡이며 재즈바에 들어섰다. 문을 열자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흐릿하게 재즈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있었고 전체적으로 우드톤의 인테리어가 고풍스러웠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니 무대와 테이블이 보였다. 무대 뒤 빨간 벨벳 커튼과 테이블 위 촛불이 한층 더 재즈바의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한국에서도 재즈바를 몇 번 가봤지만, 풍경이 훨씬 이국적이었다. 사람들은 깔끔하게 갖춰 입고 식사를 즐겼다. 부끄러웠다. 내 복장은 맨투맨에 청바지 차림이라 누가 봐도 관광객이었다. 별도의 규정은 없었지만 상황에 어울리게 옷을 챙기지 못해 민망했다. (레오는 검은 셔츠와 슬랙스를 입었다) 운 좋게 무대 가까운 자리가 우리의 예약석이었다. 의자에 앉아 옷에 묻은 빗물을 조심스럽게 털어냈다.

남색 정장에 갈색 구두를 신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백발의 흑인 드러머, 키 큰 피아니스트가 서로 눈빛을 주고 받더니 본격적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박자를 쪼개고 쪼개 아슬아슬하면서도 리드미컬하게 연주했다.

재즈는 즉흥적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흐름이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박수를 어느 타이밍에 쳐야 할지 파악하기 어려운 장르다. 돌아가며 하나의 악기가 주인공이 되어 곡을 끌고 가는 구간이 끝날 때쯤 눈치껏 손뼉을 쳤다. 우리는 틈틈이 와인 잔을 부딪쳤고, 레드 와인은 찰랑거렸다.

사람들은 각자 대화에 빠져 재즈를 순전히 배경음악으로만 둔 것 같았다. 반대로 우리는 음악에 집중했다. 그 어떤 관객보다도 크게, 또 자주 박수치며 호응했다. 연주자를 향한 예의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무대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기도 했고, 마지막 밤인 만큼 이 낭만적인 분위기에 적극적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드러머는 곡이 끝날 때마다 “Thank you!”로 짧게 인사한 다음 잘 즐기고 있냐며 질문을 던졌다. 재즈바에 있는 사람만 족히 40명은 넘는 것 같은데 대답 소리가 작았다. 그가 민망하지 않게 “Yeah!”하고 외쳤다. 한 시간의 공연이 끝나자, 드러머는 우리 자리로 다가왔다. 레오와 하이파이브를 하더니 엄지를 치켜세웠다. 너희들은 최고의 관객이었다며 고맙다고 말했다. 멋진 연주에 화답했을 뿐인데. 뿌듯하면서도 이 밤이 끝나가는 게 무척 아쉬웠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오늘 하루가 신기했다고 입을 모았다.

“어떻게 하루에 세 가지 장르의 음악을 들을 수 있지?”

“같은 시드니인데 다 다른 느낌이 들었어.”

오페라하우스의 야외 콘서트는 시드니 야경에 어울리는 소리를 덧입혔다. 핼러윈 축제의 컨트리 송은 우리가 축제를 더 편안하게 즐길 수 있게 도와줬다. 예상보다 황홀했던 재즈는 금요일 밤을 마무리하기에 제격이었다.

코스를 정한 건 우리였지만 음악이 이끄는 대로 기분 좋게 끌려다녔다. 시드니의 마지막 날은 장르마다 달랐던 분위기로 기억에 남는다. 공연장을 둘러싼 빛과 어둠, 사람들이 만들어낸 소음과 열기, 연주자의 표정까지 한데 섞여 어떤 장면으로 내 머릿속에 박제되었다. 눈을 반짝이며 몰입했던 우리의 모습도 눈에 선하다. 음악을 중심으로 모든 요소와 감각이 어우러지는 총체적인 느낌, 우리는 그 분위기를 사랑한다. 분위기로 시드니의 추억을 간직하고 싶다. 마음 한쪽에 두고 오래 사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