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엘리엇에서 브리즈번으로 돌아왔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도심으로 돌아가는 경비행기 안에서 찔끔 눈물이 나기도 했다. “꼭 다시 한번 와야지!” 라는 말 뒤에는 우리가 이곳에 다시 못 올 확률이 높다는 뜻이 숨어있기도 했다. 보통 해외여행의 경우에는 한 번 간 곳을 다시 찾기란 드물기도 하고.

섬에서 해보고 싶었던 것을 다 해봤기 때문에 딱히 하고 싶은 액티비티나 남은 일정도 없었다. 유일하게 ‘선물’을 사기 위해 하루 정도만 비워둔 게 다였다. 우리는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날, 그러니까 브리즈번에서 온전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단 하루 동안 선물을 사는 일정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시드니에서 기념품 몇 개를 사긴 했지만, 이제는 정말 쇼핑할 때가 되었다 싶었다. 신혼여행지에서 선물을 고르는 일은 힘들었다. 뻔한 선물은 사고 싶지 않았다. 예를 들자면 작은 코알라 인형이나 볼펜 끝을 누르면 권투 글러브를 낀 캥거루가 펀치를 날리는 플라스틱 펜 같은 것 말이다. 이왕이면 받을 사람도 기분 좋게 쓸 수 있는 선물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선물을 전할 사람의 명단을 마음속으로 그려보고 있었다. 신혼여행은 다른 여행과 다르게 챙겨야 할 사람이 더 많고 약간의 의무감도 따른다. 양가 부모님, 시조카, 주례를 봐주신 신부님, 결혼식에 함께해 주신 분 중에 꼭 답례하고 싶은 분들까지.

연령대와 우리와의 관계에 따라 선물의 종류는 나뉜다. 손가락으로 세어보아도 열 명은 족히 넘는 사람에게 선물해야하기 때문에 비용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능 바세린이라 불리는 포포크림은 뻔한 선물에 속하긴 하지만, 가격대나 실용성 차원에서 괜찮은 선택지가 되었기에 꽤 많이 사두었다. 마트, 드럭 스토어 등지에서 파는데 파는 곳마다 가격이 다르기도 해서 보이는 족족 들어가 가격을 비교하고 앞에서 본 매장보다 싸다 싶으면 서너 개씩 더 사들였다. 아이가 있는 집에는 코알라 캐릭터가 그려진 반창고, 읽고 쓰기를 좋아하는 분께는 호주 매거진을, 음식을 좋아하는 친구에게는 달걀을 세워놓는 에그 홀더를 주고 싶었다.

눈이 즐거웠던 쇼핑은 호주의 차 브랜드인 T2에서 차를 고를 때였다. 쨍한 색감이며 차 종류마다 색을 달리한 패키지가 매력적이었다. 화려한 무늬의 찻잔 앞에서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세계적인 출판사 '펭귄북스'와 협업한 한정판 선물 세트가 압권이었는데, 내 소장용으로 사고 싶었다. 시각적으로 현혹(?)한 다음에, 갖고 싶게 만드는 기술이 결국 사람의 지갑을 열게 하는 거구나 이곳에서 많이 느꼈다. 화려한 패턴의 찻잔이 우리 취향은 아니었지만, 잔 수집이 취미인 작은 엄마께는 선물을 드리고 싶어서 하나 골라 포장했다. 계산하려던 찰나, 기념으로 작은 거라도 챙겨보자 싶어 카운터 바로 앞에 놓인 티스푼 하나를 샀다. 티스푼을 집어들 수 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다. 오목한 부분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Sip, Read, Imagine" 한 모금 홀짝이고, 책을 읽고, 상상하라니. 그렇지. 이게 바로 내 취향이지.

우리를 위한 선물은 또 없냐며, 다 남들 줄 선물만 사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며 갑자기 물욕이 폭발했다. 가드닝 책을 여러 권 샀고, 맨투맨과 후드티를 하나씩 샀다. 초콜릿을 좋아해서 초코 과자도 몇 개 샀다. 카드를 팍팍 긁었다. 여전히 우리 선물보다 남 줄 선물이 훨씬 많긴 했다. 그래도 기분만큼은 좋았다.

남을 위한 선물을 고심해서 고르고 포장하는 일은 즐겁다. 받았을 때 상대방의 기쁜 표정과 올라간 톤의 한마디를 듣는 게 좋다. 그게 바로 선물의 매력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어떤 이유로든 감사의 인사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짧은 문장의 몇 마디를 정성스럽게 손으로 꾹꾹 남기고, 선물을 쇼핑백에 넣어 나갈 채비를 할 때 즐거웠다.

앞서 말한 T2에서 우리는 여러가지 맛이 들어있는 티백을 샀다. 카페인 있는 차를 마셔도 되는 사람인지, 상큼한 시트러스 계열이 어울리는 사람인지, 아니면 보다 익숙한 얼그레이 같은 홍차 계열을 좋아할 사람인지 가늠하며 몇 개씩 챙겼다. 때론 맛을 떠나서 그 사람과 잘 어울릴 것 같은 색으로 포장된 차를 고르기도 했다.

여전히 우리 집 옷방에는 선물 더미가 남아있다. 아직 전하지 못한 선물이 쌓여있다. 혹시 몰라 사둔 프로폴리스 치약과 간식 같은 것들이 그 예다. 줄 사람을 확실하게 정한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만나면 줘야지'하는 마음으로 사둔 것도 있다.

아무 대가 없이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 사람을 위한 선물을 고르는 시간 자체가 요즘일수록 더욱 귀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하기 쉽다. 그리고 물건이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정말 그 사람의 취향과 상황, 종합적으로 경우를 다 살펴서 신중하게 선물을 고르는 과정 자체가 타인을 한번 더 생각하고 타인과 나의 관계를 돌아보는 일이라고 본다. 해외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기념품을 주는 것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결혼, 출산, 생일, 어떤 위로가 필요할 수도 있고, 크리스마스니까, 새해라서, 아니면 어떤 이유 없이 어떤 물건을 보고 그 사람이 생각이 나서일 수도 있다.

예전보다 선물하기가 쉬워졌다. 카카오톡 선물하기 서비스를 이용하면 내가 상대방을 만나지 않아도 핸드폰에서 몇 번의 스크롤과 클릭만으로 선물할 수 있다. 그 선물도 좋다. 하지만 직접 내 손끝으로 만져보고 스크린 화면이 아닌 물성있는 것들을 골라보고, 선물 가게 주인의 추천도 받아보면서 이야기하는 과정 자체가 선물을 주는 행위의 시작인 것도 같다. 조금 인간적인 방식의 선물하기, 다시 말해 조금은 덜 기술적인, 그 사람의 취향에 맞춰 선물을 고르는 기술만 있으면 되는, 기꺼이 나의 공을 들이고 감각을 동원해 선물하는 일을 조금 더 많이 늘려보고 싶다.

돌려받는 걸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를 위해 베푸는 마음은 언제나 옳다. 나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살면서 조금 더 선물을 정성스럽게 고르고 자주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값비싼 물건이 아니더라도, 내가 이만큼 당신을 생각한다고 작게나마 손에 쥐어주며 마음속으로 이야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