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마법의 몸짓과 단어가 있었다. 눈을 맞추고 미소 지으며 건네는 “Hi”, “Hello”, “Good morning”, “How’s it going?” 같은 말이었다. 좁은 곳이든 넓은 곳에서든 이런 말들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도심 속 호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드넓은 바다가 펼쳐진 섬에서도 자주 들었다. 호주 사람들은 쉽게 인사하고 안부를 물었다.

여러 번 들은 말이 하나 더 있었다. “Sorry.”

좁은 길을 지나갈 때, 자신의 아이가 타인의 자리를 침범했다고 느낄 때 등 호주 사람들은 다양한 순간에 쉽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덕분에 호주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도 "Hello", "Sorry" 같은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어느 순간에 나와도 어색하지 않은 말들이었다. 

"Sorry"와 비슷한 지분을 차지하는 한마디가 또 있다. “Thank you”였다. 레스토랑 종업원에게, 트램 기사에게, 멋진 노을을 보여준 호주의 하늘에게 ‘땡큐’란 말이 쉽게 나왔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좋은 관계를 만드는데 미안함과 고마움을 자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신기하게 우리도 호주에서 자연스럽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여행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와 출근하던 어느 날이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버스 도착 시간을 앱으로 확인했다. 1분 뒤 집 앞 정류장에 버스가 온다는 알림을 보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달렸다. 저 멀리 초록색 마을버스가 보였다. 버스는 출발하려다 뛰는 나를 발견했는지 멈춰 섰다. 버스 뒤 엉덩이에 붉은 램프가 밝아졌다. 

다행히 버스를 놓치지 않았다. 카드를 찍고 버스 계단을 올랐다. 가슴 아래에서 올라오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입 언저리까지 가져왔다가 결국 내뱉지 못했다. 그런 내 모습에 의아했다. 다른 나라에서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쉽게 감사함을 표현했는데, 정작 한국에서는 이 말을 삼키고 말았을까? 출근하는 내내 생각에 잠겼다. 우연히 본 최재천 교수님의 유튜브 영상에서 힌트를 얻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스몰토크(small talk) 잘하는 방법’이란 제목의 영상이었다. 교수님 의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워낙 스몰토크를 못하는 걸로 유명하다고 한다. 교수님은 미국에서 15년을 살아 인사와 스몰토크가 익숙한 분이었다. 한국 대학에 돌아와 복도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사람들은 인사를 잘 받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학교에 본인이 이상한 사람이란 소문이 돌았다.

문화 차이를 느낀 후에 교수님은 가벼운 목례로 인사 방식을 바꿨다. 엘리베이터에 타 있는데 누군가 들어오면 가볍게 웃으며 ‘나는 당신을 인지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의미로 고개를 약간 까딱였다. 상대방도 목례로 답한다면 폐쇄된 좁은 공간에서의 어색함을 깨고 엘리베이터를 같이 탈 수 있었다.

교수님은 우리나라와 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굉장히 좁은 땅에서 정착 중심의 농경문화에 익숙한 민족이었다. 주변에 모르는 사람이 없고, 웬만하면 다 아는 사람이었다. 서양인은 넓은 땅에서 대개 유목 생활을 했던 민족으로,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우리보다 훨씬 잦았다. 

악수 역시 비슷하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악수는 현대인에게 익숙한 행위다. 대부분의 전문가는 악수가 손을 잡는 게 아니라 ‘빈손을 보여주기 위해’ 시작된 행위라고 말한다. ‘내게 무기가 없고, 당신을 해칠 생각이 없다.’. ‘그래, 나도 무기가 없다.’는 뜻의 동작이다. 뻘쭘하니까 손 한번 잡아주고 끝내는 식의 행위가 악수의 시작이라고 바라봤다. 

반면에 우리나라 사극을 보면 악수하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서로서로 잘 아는 문화였으니 내 손을 보여줘야 할 필요가 없었다.

서양 사람들은 서로를 모르기에  “How are you?”로 먼저 물으며 ‘나는 당신을 해칠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를 해치는 것도 나는 원하지 않습니다.’ 라는 뜻에서 경계를 푸는 과정이라고 교수님은 해석했다. 다시 말해 인기척을 내고 상대를 인지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안심시키는 행위라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그럴 필요가 없는 문화에서 살았지만, 서양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도시화로 도심에 사람이 몰리면서 사람 간의 거리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서양인처럼 서로를 안심시키는 ‘Hi”나 악수 같은 도구를 습득하지 못해 뻘쭘한 상황이 만들어졌으니, 어떤 사람은 불안하기까지 한 것이라고 교수님은 덧붙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언어의 역할도 크다고 영상에서 나오는데, 이 부분 역시 동의했다. 서로 이름을 부르기도 애매하고, ‘안녕’이라 말하기엔 너무 경박하고 어색하다. 외국에서는 “Hey, Hi” 라고도 말하는데 우리는 그런 것을 표현할 단어 자체가 없을뿐더러, 선조들이 모르는 사람을 처음 만날 때 건네는 말에 대한 흔적도 없다고 했다. 

동시에 우리에겐 상대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친절한 호주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그들은 관찰할 줄 알고, 주변 상황을 이야기할 줄 알았다. 예를 들어 “네 셔츠 멋지다”, “오늘 하늘 정말 파랗다. 바다에서 수영하기 좋겠는데?”라는 식의 말을 던졌다. 날씨 이야기를 절대 꺼내지 말라는 한국인의 스몰토크 비법서를 어디서 보았는데 교수님은 이와 다르게 말씀하셨다.

내가 호주에서 스스럼없이 말을 건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여행자에게 보낸 미소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말을 잘 들어주기 위해 경청하는 눈빛을 보면 말이 쉽게 나왔다. 누군가 냉소적이고 무표정한 모습을 보였다면 주저하다 말을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도심 속 한국인의 얼굴은 대부분 무표정을 띄거나 힘들어 보인다. 마을버스에서 내가 ‘감사합니다’를 외치지 못했던 이유도 비슷했다. 기사님에게 무응답으로 거절당할까 두려웠다. 무표정한 사람들로 가득한 버스에서 난 여행자가 아니었다. 관대함의 눈빛 대신 의아해하는 시선을 받을 수도 있었다. 호주와 대비되는 분위기에 얼어붙어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내뱉는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 사람들도 저렇게 나오는데 고맙다고 말하면 ‘오히려 나만 손해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용기를 내보려고 한다. 적당한 선에서 인사를 하거나 한 마디 먼저 건네야겠다고 다짐한다. 버스에서 내가 ‘감사합니다’하고 말했더라면 기사 아저씨가 하루를 더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부터 미소를 건네고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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