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공항 출구를 빠져나오자 마자 '호주 땅을 밟았구나' 실감했다. 호주는 자외선이 세다고 들었는데, 머리가 따가울 정도였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봄 날씨 같았지만, 햇볕만큼은 여름이었다. 황급히 맨투맨 티를 벗어 허리에 묶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꼈다.

숙소가 있는 도심까지는 버스로 30분 만에 도착했다. 시드니와 한국은 2시간의 시차가 나서 바로 돌아다닐 수 있었는데, 체크인까지 5시간이나 남은 게 발목을 잡았다.

👰🏻“물품 보관함 같은 곳에 짐을 놓고 돌아다니자.”

🤵🏻“그냥 호텔로 가서 물어보는 건 어때?”

가이드대로 따르는 편인 나와 일단 부딪혀보는 남편의 의견이 엇갈렸으나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다행히 호텔 프런트 매니저가 아침 10시였지만 체크인을 도와줬다. (남편 승!) 객실에 도착해 17kg짜리 캐리어와 노트북이 든 백팩을 던지듯 내려놓고 곧장 창가로 달려갔다.

와~ 창 너머 공원 전망이 끝내줬다. 고층 빌딩과 녹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나무들 사이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작게 보였다. 이제야 제대로 된 시드니의 모습을 마주한 것 같았다.

풍경을 감상하고 나갈 채비를 하다 보니 다음 목적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우리 그럼 이제 뭐 하지?" 장시간 비행에 힘들까 봐 첫날은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시티 투어 버스를 타고 곳곳을 훑어볼까 싶었지만, 근처 동네도 파악할 겸 가볍게 공원을 돌아보기로 했다. 두 발로 걸으며 이 도시와 천천히 친해지는 거야!

하이드 파크(Hyde park)는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으로, 1820년대에는 여기서 경마나 크리켓 경기가 열렸다. 200년 넘은 공원답게 나무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어른 여러 명이 팔을 둘러야 한 그루를 온전히 안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양옆으로 나무가 빼곡한 길을 걸을 때는 정령이 깃든 나무 군단의 호위를 받는 것만 같았다. 

잔디밭에 앉아 쉬는 사람들, 공원을 가로질러 출근하는 정장 차림의 회사원, 가뿐히 달리는 러너를 두루 보았다. 물론 우리처럼 두리번거리며 감탄하기 바쁜 관광객도 있었다. 

공원 한쪽에 깔린 커다란 체스판에서는 게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가 말을 어느 칸으로 옮길지 고민하던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국적이었다. 

구경하던 중 하얀 코털이 무성한 백인 아저씨가 갑자기 옆에 오더니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체스를 둘 줄 모를뿐더러, 아저씨가 너무 빠르게 영어를 쏟아내서 알아듣지 못했다. ‘Oh, Really?’, ‘Awesome!’을 연발하며 맞장구를 쳤다. 중계를 끝낼 마음이 없으신 듯해서 대답할 타이밍을 기다렸다 ‘Thank you!’를 외치고 슬그머니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한국에서 들을 수 없는 신기한 새 소리, 영어로 오가는 말소리, 이따금 들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어우러졌다. 우거진 나뭇잎, 온갖 꽃과 식물들은 둘러보기에 편했다. 맑은 하늘에 덥지도 춥지도 않고 딱 좋은 공기까지. 온 감각 기관이 살아났다. 느껴지는 이 모든 게 '살아있다는 감각'이자 '내가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는 신호 같았다. 

'공원에 오길 참 잘했구나' 싶었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향할 때는 긴장한 이방인 모드였다가, 호텔 방에서는 창밖을 관망하는 관광객 모드였는데, 이제는 아니다. 공원 특유의 무해함과 여유로운 분위기는 낯선 도시에 이제 막 발을 들인 여행자의 긴장감을 해소하기 충분했다. 나도 이 도시에 마음의 문을 열었고, 이 도시도 내게 곁을 주었다. 

벤치 앞으로 털이 보송보송한 어린 골든 리트리버가 다가왔다. 손등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코를 킁킁거리더니 손등을 할짝거렸다. 강아지 주인은 미소를 띠며 우리와 눈인사를 나누고 그길로 지나갔다. "시드니에 온 걸 환영해!"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여행 첫날이라 참 다행이다. 하이드파크를 걸을 수 있는 날이 아직 많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