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의 여자는 메뉴판을 한 장 한 장 천천히 살펴봤다. 책장을 넘기는 것 같기도 했고, 음식을 입에 넣고 음미하는 것처럼 느긋했다. 이따금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 올렸다. 우리가 지금껏 본 사람 중에 가장 메뉴판을 오래 보는 사람 아니냐며 신기해했다. 네모난 테이블은 빳빳하고 새하얀 천으로 덮여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정갈하게 포크와 나이프가 두 세트씩 놓여있었다. 7년 전 우리가 방문한 프라하의 ‘캄파 파크’란 레스토랑 풍경이었다.

누가 봐도 고급 레스토랑이었는데 값이 얼마나 하겠냐며 호기롭게 들어간 곳이었다. 창밖에 보이는 유명한 카를교의 야경과 분위기는 끝내줬다. 다행히 예약 없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어 안내를 받고 메뉴판을 들여다봤다.

당시 우리는 돈이 그리 많지 않은 20대였다. 세세히 계산한 것은 아니었지만 딱 봐도 두 사람이 제대로 갖춰 먹으면 20만 원은 훌쩍 넘길 것 같았다. 남자친구였던 레오는 괜찮다고 그냥 마음 편히 시키라고 나를 달랬지만 나는 속으로 '나갈까 말까' 고민했다. 하지만 이미 홀 서버는 유리컵에 물을 따라준 지 오래였고, 여기서 ‘다음에 올 게요’ 하고 자리를 뜨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먹고 가자 싶어 주변에서는 어떤 요리를 시켰는지 곁눈질로 흘끗 본 다음 조심스럽게 주문했다. (아까 본 백발의 여인은 그때까지도 메뉴판을 정독하고 있었다.) 메인 요리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애피타이저 메뉴 2개를 고르고, 스테이크 한 덩이를 시켰던 걸로 기억한다. 눈치껏 먹고 나와서 결제하니 10만 원 정도 나왔다.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우리는 정말 아끼면서 여행을 다녔던 터라 너무 비싸게 느껴졌다. '먹는데 이렇게 많은 돈을 왜 써야 하나?' 싶었다. 7년이 지나 30대 중반이 되어 그날의 나를 떠올리면 아쉬움이 남는다. 그 정도 쯤이야 감당할 만한 금액이었는데…. 동유럽이었으니 그 정도면 합리적인 수준이었는데…. 맛있게 먹어 놓고 돈을 많이 썼다며 살짝 후회했던 내가 옹졸해 보였다. (동시에 어떤 메뉴를 시켜야 하는지 잘 몰랐던, 서툴렀던 그때의 우리를 생각하면 조금 귀엽기까지 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주머니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 극적으로 많이 벌게 된 건 아니지만 월급의 앞자리 수가 바뀌었다. 이런 걸 즐기는 게 다 좋은 경험이 될 거라는 마음도 자랐다. 

우리는 신혼여행인 만큼 돈 걱정하지 말고 하룻저녁 식사 정도는 근사하게 즐겨보기로 했다. 스테이크가 유명한 맛집이면서 동시에 오페라하우스 야경이 멋진 곳을 핸드폰으로 찾아봤다.

레스토랑의 이름은 ‘6HEAD’였다. 평일 저녁이라 다행히 야외석에 빈자리가 났다. 어둠이 짙어지며 오페라하우스의 입체적인 지붕이 은은히 빛났다. 해가 지고 강바람까지 부니 제법 쌀쌀했다. 야외용 히터가 화르르 타고 있어 다행히 온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테이블마다 아령처럼 생긴 황동 조명에서 은은한 빛이 나왔다. 사람들은 와인 한 잔씩 홀짝이며 식사를 즐겼다.

아이패드로 된 메뉴판을 쓱 훑어봤다. 은근히 부담스러워할 나를 의식했는지, 레오는 여행 공금에서 빼지 않고 본인이 다 내겠다고 말했다. (어? 좋아! 라고 덥석 얘기했지만 이제 당신 돈이 내 돈이고 내 돈이 당신 돈 아닌가요….)

우리는 과감하게 T자 모양 뼈 양옆에 등심과 안심이 붙은 '티본 스테이크'를 시켰다. 사실 가장 적은 중량의 스테이크를 시켜도 되었는데, 레오가 스테이크를 좋아하기도 하고, 제대로 먹어보자며 호기롭게 주문했다. 여기에 매콤하면서도 크리미한 소스의 새우 요리, 로메인 샐러드를 시켰다. 와인이 빠질 수 없으니 와인 리스트를 보고 소믈리에가 추천해 준 레드 와인 한 병을 시켰다. 음식 맛은 훌륭했다. 새우 요리의 소스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맛이었고, 샐러드는 누구나 아는 맛이었다. 같이 나온 블랙 솔트에 찍어 먹는 스테이크는 적당히 부드러웠고 와인과도 잘 어울렸다. 

서버는 메뉴 주문을 받으며 친절하게 응대했다.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냐 묻길래, 허니문이라고 쑥스러운 척 당당하게 답했다. 신혼여행의 묘미는 은근슬쩍 우리가 ‘허니문’으로 놀러 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에 있었다.

서버는 축하한다며 웰컴 와인 두 잔을 우리에게 주었다.

"결혼식은 어땠어? 큰 행사였어?"

"에이 조촐하게 했어. 한 400명 정도 온 거 같아."

"400명? 작은 규모가 아니라 엄청났네!"

구구절절 우리나라 결혼식에는 부모님의 손님이 많이 참석하기 때문에 다 나의 친구들이 온 건 아니었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래서 그냥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디저트로 작은 레드벨벳 케이크까지 서비스로 나왔다. 이 정도면 완벽한 식사였다.

음식값이 생각보다 많이 나왔다. 계산하지 않고 막 시켰더니 40만 원을 훌쩍 넘겼다. 맙소사. 내 생애 먹어본 식사 중 가장 비싼 한 끼였다. 놀랬지만 최대한 놀라지 않은 척했다. 레오에게도 7년 전처럼 불편한 기색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음식값만 내고 가기에는 조금 파렴치한 같아서 서버에게 팁을 주고 레스토랑을 빠져나왔다. 호주 사람들이 친절하긴 한데, 팁을 더 받기 위해 부러 친절하고 서비스까지 주는 것인가 속으로 의심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식사며 서비스며 무엇 하나 빠짐없이 괜찮았으니, 팁을 내도 아깝지 않았다.

사실 맛이라는 건 입안에 넣고 즐기는 찰나의 순간에 느껴지기 때문에 그 맛을 오래도록 기억하긴 어렵다. 단순한 음식의 맛뿐만 아니라 그때 나눴던 대화, 주변 풍경, 흘러나오는 음악, 공기의 온도까지 종합적으로 어우러질 때 특정 경험으로 완성된다.

40만 원의 저녁 한 끼 역시 달리 생각해보기로 했다.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만한 값을 한다고 되새겼다. 우리가 '허니문'이라는 이유로 이런 대접을 언제 또 받아보겠어. 오페라하우스를 바라보며 이런 낭만을 언제 또 즐겨보겠어. 결국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지금의 찬란함을 돈 주고 산 것과 다름 없었던 거다. '아 그때 시드니에서 먹었던 저녁 참 좋았는데’ 하며 몇 년 동안은, 아니 평생 추억할 기회까지 거저 얻은 셈이다. 우리가 프라하 캄파 파크에서의 저녁을 지금까지고 기억하며 얘기하는 걸 보면 말이다. 

나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는 대화도 근사하길 바랐다. 그때의 대화를 상기시켜 보면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어떤 부부가 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간단히 나눴다.

"좋은 경험을 함께 나누는 부부가 되자."

"추억거리로 가득한 삶을 살자." 

그래도 특별한 날에는 복장도 깔끔하게 갖춰 입고 분위기 있는 곳에서 식사 한 끼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부부가 되자고. 너무 팍팍하게 굴지 말자고. 이런 데 돈 쓴다고 죄책감을 느끼기보다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자고. 

솔직히 나 자신에게 더 너그러워지고 그런 이벤트에 인색해지지 말라는 차원에서 한 다짐이기도 했다. 그래. 하루 세 끼 365일, 그러니까 1년에 1,095번의 식사 중에 단 한 번이라면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