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이번 신혼여행으로 내 커리어가 완전히 바뀌길 기대했다. 내가 평소에 식물을 좋아하고 자연을 바라보는 일을 좋아하니까, 가드닝 산업이 발달한 나라에서 대단한 영감이나 확신을 얻고 싶었다. 그 이후로 내가 정원사의 길을 걷거나 플랜테리어 등에 뛰어들겠다고 마음먹길 바랐다.

우리가 손꼽아 가고 싶어했던 로열 보타닉 가든(Royal Botanic Garden)으로 향했다. 로열 보타닉 가든은 약 30헥타르, 9만 평에 이르는 거대한 공원이자 식물원이다. 1816년에 만들어졌고, 호주 토종 식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다양한 식물 8,500여 종으로 꾸며져 있다. 도심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릴 만큼 잔디밭이 광활했다. 입구 지도를 바라보며 앞으로 볼 게 한참 남아있다는 기대감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관광객보다도 러닝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입장한 시각은 12시 정도로 딱 점심시간이었는데, 사람들이 점심은 안 먹고 다 뛰러 나온 모양인지 족히 30명 넘게 혼자서 러닝을 하고 있었다. 와…. 우리나라 점심시간이랑 너무 다르잖아! 

햇빛에 물결이 반짝였다. 저만치 오페라하우스도 보이니 전망마저 완벽한 공원이었다. 영화에 나올 법한 나무 괴물처럼 엄청나게 큰, 수령이 족히 200~300년은 거뜬히 넘긴 듯한 나무들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서 있었다. 호주의 벚꽃이라 불리는 보랏빛 자카란다는 바람에 꽃잎을 떨구며 서 있었다. 나무 아래에만 꽃잎으로 뒤덮여 보라색으로 물들던 모습은 ‘여긴 내 구역이야’ 하고 자카란다가 으름장을 놓는 것만 같았다.

생전 처음 보는 꽃들은 정해진 구역 안에서 조금은 자유분방하게 심겨져 있었다. 어떤 구역에는 열대 우림처럼 키 큰 야자수로 가득했다. 박쥐란을 발견했을 때에는 소리를 질렀다. 우리 집에는 자그마한 화분에 잎이 5개 정도 난 박쥐란이 있는데, 이보다 7~8배는 더 크게 자라고 있었다. 튼실한 나무 기둥에 용맹을 떨치며 잎을 뻗쳤다. '와, 이건 정말 자연이 키운 거다!' 싶어 놀랐다. 내가 알던 식물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자라는 모습이 생경하면서도 신비로웠다. 

식물도 식물이지만 처음 보는 새 역시 많았다. 어떤 구간에서는 땅을 잘 보고 걸어야 했다. 바닥에 하얀 새똥이 가득한 길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키 큰 나무들 위로 비둘기보다 3배는 큰 몸집의 아이비스 두 마리가 앉아있었다. 새의 화장실인가. 새들이 움직이면서 나뭇잎도 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후두두두 새똥이라도 떨어질까봐 황급히 내달렸다.

작은 연못에는 오리가 물장구를 쳤다. 연못 가운데 석조 구조물에서 오리가 물로 천천히 걸어내려갈 수 있게 비스듬한 경사로가 있었다. 정말로 오리는 경사로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동물을 생각하다니! 싶어 놀랐다. (다른 용도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걷던 와중에 맹그로브처럼 나무뿌리가 치렁치렁 내린 나무 행렬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빨간 트랙터 한 대와 정원사를 보았다. 정원사는 나무 기둥 주변에 원으로 된 구역을 정돈하고 있었다. 원 안은 갈색 나무껍질로 덮여 있었고, 원 밖은 잔디가 깔려 있었다. 정원사는 갈퀴로 바닥을 긁고 허리를 숙여 땅을 골랐다. 호기심이 발동한 레오는 정원사 아저씨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나는 저만치 걷다가 대화가 시작되는 듯한 소리를 듣고 두 사람이 서 있는 쪽으로 슬그머니 걸음을 옮겼다. 정원사 아저씨는 나이가 적어도 60대는 되어 보였고 배가 조금 나와 푸근한 인상이었다.

🤵 “어떤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왜 나무 아래 바닥을 동그랗게 구분하는 거죠?”

👴 “사람이 나무 가까이 가지 못하게 구역을 나누는 거예요. 나무껍질을 덮어서 습도를 유지하고, 잡초가 자라지 않게 막는 효과도 있어요.”

예전에 들었던 가드닝 클래스에서 나무껍질을 다룬 게 생각나 나도 한 마디 보태고 싶었다. 정원사에게 대뜸 물었다. “이거 바크네요. 바크 맞죠?” 정원사는 환하게 웃으며 맞다고 답했다. 고작 단어 하나였지만 가드닝에 관해 영어로 말이 통한다는 것 자체가 뿌듯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드닝이 호주만큼 대중적이고 활성화된 산업이 아니라서 배울 곳이 많지 않다고 말하니, 정원사가 이렇게 답했다. 핸드폰을 들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여기 다 있잖아~ 너도 다 배울 수 있어!” 맞다. 관심이 있다면 찾아볼 것이고, 마음만 먹으면 관련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내가 배움의 기회를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고 질문한 게 부끄럽기도 했다. 간단히 대화를 마친 다음 우리는 산책을 이어 나갔다.

코스가 다 끝나간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 벤치에 앉아 너른 잔디며 온갖 풀과 나무를 눈에 담았다. 공원이 없었다면 얼마나 삭막했을까. 내가 언제 이 멋진 공원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슬프기까지 했다.

우리는 여행 끝에 기념품을 사들였는데, 가드닝 관련 서적을 포기할 수 없었다. 잡지며 책, 식물 키우는 팁이 적힌 카드 세트까지 샀다. 출국할 때 수하물 무게가 규정보다 초과되는 바람에 짐을 다른 가방에 나눠담느라 애를 먹었지만,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았다. 지금 책장에 꽂혀 영롱하게 초록 표지를 뽐내고 있는 책더미를 바라보면 기분이 좋다. 그래서 그 책을 끝까지 읽었냐고? 영문으로 되어 있어 끝까지 읽기가 어려웠다. 중간중간 흥미로운 부분만 읽고 함께 실린 사진과 삽화를 구경하는 정도로 만족한다.

레오의 기습 질문에 당황하여 생각에 잠겼다. 나는 하고 싶은 거라 굳게 믿고 있었는데, 쉽게 대답이 안 나오는 걸 보니 절망적이었다.

진로 강사인 친한 언니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무언가를 진짜로 좋아하면, 그걸 경험하고 나서 네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돌이켜 봐. 진짜 좋아하는 사람은 그걸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거나, 그것을 어떤 창작물로 표현하거나, 이거 너무너무 좋다고 떠들거나 할 수도 있어."

근데 나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새로운 식물을 보는 족족 핸드폰으로 찍어 사진첩에 식물 사진으로 가득한데, 이 사진을 공책에 오려 붙여 스크랩하겠다는 포부는 어디 가고 그 일을 잔뜩 미루고 있었다. 딱히 그다음 액션을 취하지 않은 거나 다름없다. 물론 가드닝 수업, 조경 디자인 관련 교육 코스가 인스타그램을 통해 광고도 많이 보이지만 일정, 장소, 만만치 않은 수강료가 고민되어 주저했다. '이 돈과 시간을 들여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맞나?' 스스로 물었을 때 좀 겁이 났다. '그렇게 투자했는데 적성에 안 맞으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이 먼저 들었다.

“아닌가 봐. 근데 난 초록 식물들과 거대한 나무를 보면 기분이 좋아. 그냥 좋아. 이름이 재밌으면 그대로 재밌고, 생김새가 독특하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벅차. 이유는 없어. 그게 다야.”

“온은 아름다운 걸 보면 감응하고 감동하고. 그냥 그런 걸 느끼는 걸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이 아닐까? 감각이 특기인 거야. 만약 가드닝을 진짜 하고 싶다면 정원사가 어떤 도구를 쓰는지, 어떤 흙을 쓰는지, 어떻게 식물을 배치했는지를 더 들여다보지 않았을까?” 모르겠다로 얼버무리며 나는 대답을 피했다. 

고민의 날들이 길어졌다. 친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놨더니 영화를 예로 들며 아주 명쾌하게 설명해주었다. 세상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어서 직접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있는가 하면,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이를 해석하고 알리는 평론가도 있는 거라고. 이동진 평론가가 영화를 만들지는 않지 않냐며... 모두가 꼭 무언가를 만들 필요는 없다고.

어떤 대상을 어떤 방식으로 좋아하냐의 차이일 뿐이구나.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에 해당 분야를 접목하면 그게 전부가 아닐까. 어째서 나는 정원을 설계하는 일을 '좋아한다'고 착각했을까. 멋져 보여서? 아니면 우리나라 1세대 조경가인 정영선 선생님의 영화를 보니 그 일이 너무 대단해 보여서? 선생님이 80대에도 현역으로 정원을 만드시는 게 멋있어 보였던 건 아닐까? 나는 아직 그만큼 정원을 좋아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 발을 담가보고 그런 말을 해도 늦지 않는데. 맞는지 안 맞는지는 직접 경험해봐야 알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까먹은 게 분명하다.

가파른 제방을 따라 조성된 곳이어서 경사로가 대부분이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식물로 뒤덮여 있고, 뿌리만 봐도 압도적인 오랜 나무들이 곳곳에 심겨 있다. 인적이 드물어 그만큼 여유가 넘친다. 멍하니 시드니 항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갈 이유가 충분하다.